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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강 절경에 반하고 人蔘 향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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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강 절경에 반하고 人蔘 향에 취하다’
  • 유경훈 기자
  • 승인 2015.09.3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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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까지 건강해지는 금산 여행
▲ 적벽강

[투어코리아] 금수강산(錦繡江山)의 축소판 충남 금산(錦山)은 적벽강, 보석사, 이치대첩지 등 경관이 아름다운 명소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이다. 특히 이치대첩지에는 쓰라린 임진왜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늘이 내린 명약’ 인삼이 지천에 널려 있어 건강을 추스를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더욱이 10월 초에는 금산인삼축제(10월 2일~11일)가 열려, 이때쯤 금산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보석사 가는길

기암절벽 휘감는 적벽강
전북 장수군에서 발원한 금강은 무주와 진안을 거쳐 충북과 충남을 적신다. 맨 마지막에는 서천 금강하구언을 통해 서해로 흘러드는데 그 물길이 장장 402km에 달한다. 금강은 100리 골짜기를 휘감아 흐르는 동안 이름이 세 번 바뀌는데, 금산 적벽을 적시고 흐르면서 ‘적벽강’으로, 부여의 부소산에 당도해서는 ‘백마강’으로 불리며 지역의 역사와 자연을 보듬는다.

적벽강(금산군 부리면 수통리 위치)의 적벽(赤壁)은 붉은색의 바위벽을 뜻하는데, 30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적벽은 부리면의 최고봉 성주산이 남쪽으로 줄기를 뻗어 내리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각산을 일구고 금강으로 자락을 급히 내려 기암절벽의 절경을 빚어냈다. 적벽 아래로 도도히 흐르는 적벽강은 물놀이하기에 좋은 자갈밭이 넉넉하게 펼쳐져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 곡창 사수한 이치대첩지
임진왜란 3대(한산.진주.행주) 대첩 중 한산대첩과 진주대첩은 호남을 손에 넣으려 했던 왜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 조선의 곡창을 지켜낸 큰 싸움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호남의 곡창을 지킨 3대 대첩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게 ‘이치대첩’이다.

이치대첩은 조선 침략 채 한 달도 안돼 부산성과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하는 왜적의 사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한산대첩이 있던 날 금산에서 벌어진 이치대첩은 군량미 보급처를 확보하기 위해 호남을 공략하고자 전주로 진군하던 왜적을 막아선 사건으로 1,500의 관군·의병이 2만의 왜적을 격퇴시켰다.

 

임진년 7월 8일 적장 고바야카와 다카가케는 군량미 보급처를 확보하고자 2만의 병력을 이끌고 배티재를 넘으려 했다. 왜적들의 동태를 미리부터 파악하고 있던 권율 장군은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명의 관군·의병을 데리고 그들이 넘고자 하는 고개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7월 8일 아침 전투를 벌였다.

협곡의 험한 지형지세를 이용한 권율 장군의 전술전략은 적중했지만 아침에 시작된 치열한 전투가 해 질 무렵까지 이어지며 배티재를 피로 물들였다. 결전을 벌인 끝에 적을 물리친 이 전투가 바로 조선의 곡창을 지킨 이치대첩이다. ‘이치’(梨峙)란 이름은 배티재 일대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 이’와 ‘고개 치’를 쓴 것이며, 임진왜란 때 대첩을 이뤄 ‘이치대첩지’가 됐다.

천년고찰 보석사
보석사(寶石寺)하면 은행나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앞쪽에 비범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65호) 한 그루가 심어져 있어서다. 수령이 천 년을 훌쩍 넘겼다는데, 통일신라 현강왕 12년(886) 조구대사가 창건했다는 보석사와 천년의 세월을 함께한 천년지기이다.

보석사 초입은 길 양 옆으로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어 탐방객을 맞는다. 보석사의 당우는 조선후기 명성왕후가 중창해 원당으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는 요사채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공주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할 때 거처하던 곳이다.

보석사

대웅전 오른쪽에서 뒤로 약간 물러선 자리에는 보석사 의 영각 기허당이 위치하고 있다. 영각의 이름을 ‘기허당’이라 한 것은 기허당 영규대사의 법명을 따 세우고,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허당의 오른쪽 뒤 언덕에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최고 명당 만인산 태조대왕태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안치했던 곳으로, 만인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조대왕태실은 본래 함경도 용연(龍淵) 있었으나 태조 2년(1393) 당시 전라도 완주군 진동현이었던 현재의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로 옮겨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을 훼손해 태 항아리를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이에 1993년 지역 주민들이 남은 석비와 석물을 수습해 현재의 위치에 복원했다.

태조대왕 태실

태조대왕의 태실은 전면에 배치된 비석의 귀부가 눈길을 끈다. 귀부는 비 받침 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 태조대왕태실의 귀부는 네모난 바닥 돌을 초석으로 놓고 그 위에 큼직한 한 돌을 조각해 만들었다. 거북의 머리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표정이 풍부해 묘미를 더한다.

<사진/금산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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