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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개 섬이 무리지어 있는 ‘전북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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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개 섬이 무리지어 있는 ‘전북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 글·사진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20.11.1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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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 ‘고군산군도’는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20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섬들이다. 바다 위에 무리지어 있는 섬들이라는 고군산군도에서 산이 무리 지어 있다는 뜻의 ‘군산’이 됐다. 군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군산군도’를 옛날에는 ‘군산도’라고 했으나 지금은 그 명칭을 현재의 군산시에 넘겨주고 옛(古) 군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군산군도 방축도 전경
고군산군도 방축도 전경

군산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문화도시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왜구가 자주 침탈하던 곳으로,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산의 예전 이름이 진포(鎭浦)이며 지리적으로 금강 하구에 위치한다. 그래서 육군과 수군이 공동으로 주둔한 요충지 역할을 했다.

군산은 고려 최무선이 화약을 가지고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곳이고, 일제 강점기 부족한 일본의 쌀을 보충하려고 자기네 나라로 실어갔던 역사적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호남과 충남 지방의 기름진 평야에서 나오는 식량을 개경과 한양으로 실어 나르려고 출발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근대에 넘어와서 동학혁명의 좌절과 갑오경장을 통해서 일본은 우리의 경제권을 실질적으로 손아귀에 넣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도시다. 군산은 개항된 다른 항구와는 다르게 오직 쌀 수출에 매달리는 일본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고군산군도 선유도의 오룡묘
고군산군도 선유도의 오룡묘

일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산을 쌀 공급 수탈기지로서 개항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듯 군산항에서는 대륙침략의 구실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뱃고동소리가 쉬지 않고 울어댔다. ‘쌀의 항구’답게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상황이지만, 일명 ‘뜬다리 부두’라고 하는 부잔교는 밀물과 썰물에도 불구하고 화물 작업이 가능하였다. 항구 뒤에는 철도가 연결되어 화물을 수송하였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철로선의 흔적만 남아 있다.

이런 수탈의 흔적들은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의 소설을 통해 잘 묘사되었다. 그 당시 군산의 인구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6:4 정도였다. 군산 내항 중심에서 조선인은 밀려나고, 좋은 자리는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하였다. 신작로를 따라서 3층의 백화점과 2층의 주택과 상가들이 즐비하여 자전거와 자동차가 종종 다니는 쌀의 항구였다.

이처럼 군산은 구한말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가 얼룩진 곳이다. 이런 가운데 새만금 사업은 이제 군산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서울 면적 3분의 2에 해당하는 거대한 땅이 새로 생겨나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토가 확장된 것이다. 이제 군산은 새만금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미래도시의 이미지로 변신하고 있다.

 

<참고도서 이재언/한국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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