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6 19:11 (금)
돌멩이조차 역사가 흐르고①
상태바
돌멩이조차 역사가 흐르고①
  • 오재랑 기자
  • 승인 2013.11.14 1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의 소리가 정겨운 곳 철원(鐵原)
▲한탄강 가을 풍경

[투어코리아=오재랑 기자] 지난 10월 23일 오전 7시 내가 탄 자동차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강원도 철원(鐵原)으로 여행길을 잡았다.

설악산 단풍 소식까지 익히 전해진 터라 한탄강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을 하니, 지난 여름 래프팅을 하며 온 몸으로 느꼈던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철원으로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머리 속에선 셔터 눌러 될 곳이 하나둘 그려지기 시작했다.

철원에서 구경할 곳이 어디 한탄강뿐이던가. 철원은 남한의 최북단이면서 곡창지대가 있는 곳으로 한국전쟁 때 남북한이 서로 빼앗기 위해 숱한 격전을 치른 곳이다. 그로 인해 한국전쟁 3년 동안 철원 하늘을 그 어느 것보다 많이 날아다닌 게 총탄과 포탄이다.

지금까지 남아 당시 한국 전쟁의 잔혹한 아픔을 전해주고 있는 노동당사와 월정리역도 철원 여행에서 돌아볼 코스다. 머릿속에 이러저런 여행 그림을 그리는 사이 자동차는 벌써 경기도 포천을 지나 철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석정

남한 유일의 현무암 분출지, 고석정
철원에 도착해서 곧바로 차를 몰아간 곳이 고석정(孤石亭)이 있는 한탄강. 그런데 그곳에 나보다 먼저 당도한 것이 있었다. 만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 소식이다. 비록 한탄강 계곡을 불태울 듯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기세는 이미 고석정 주변 이곳저곳을 아름다운 색으로 입혀가고 있었다.

그 풍경은 도도히 흐르는 한탄강과 어울려 지난 여름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본디 고석정이 위치한 한탄강은 경치가 아주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남한 유일의 현무암 분출지로 한탄강 한복판에 10여m 높이의 기암이 솟아 있고 양 옆으로는 수직의 협곡이 장막을 치듯 벽을 만들어 남과 북으로 내달렸다. 그 사이로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절벽을 수놓은 오색 단풍과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데, 그 모습이 그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행한 해설사의 말을 들으니 한탄강의 비경에 홀린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유명한 분들이 많은데, 그 중 역사에 남는 인물들로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있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은 한탄강 절경에 반해 아예 건너편 중턱에 정자를 짓고 즐겼다고 한다. 그 정자가 바로 고석정이란다. 또 다른 인물로는 고려 충숙왕이 자주 찾아와 경치를 감상하며 노닐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석정이 있는 한탄강은 경치만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의적(義賊)인 임꺽정은 한탄강 한복판에 솟은 기암괴석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양으로 가는 공물을 탈취해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곳에 한탄강 절경을 벗 삼아 즐겼던 임금과, 굶주린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해주던 임꺽정은 없었지만, 태고적 간직해온 절경은 나와 함께한 시간에도 여전했다. 그리고 그 내면에 전해오는 스토리들은 한탄강의 여행 재미를 한층 배가시키는 양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승일교

남북 첫 토목기술 합작품 ‘승일교’
고석정을 구경한 나는 차를 몰아 승일교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동행한 해설사는 승일교가 최초의 남북토목기술 합작품이라 소개했다. 내용인 즉슨 승일교는 1946년 북한 정권하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철원 및 김화지역 주민들을 동원해 건설을 시작해 한국전쟁 초까지 북쪽 부분을 거의 완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남쪽 부분이 완공되지 않아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다리는 철원이 수복된 이후 1958년 나머지 부분을 우리기술로 완성시켰단다.

승일교에 대해 열심히 경청하며 운전하는 사이 자동차가 한탄 대교에 당도해 승일교가 눈에 들어왔는데, 언뜻 영화 ‘콰이어강의 다리’가 생각났다. 우리나라에 저런 다리가 있었나 싶었다.

100미터(정확히는 120m)가 넘는 다리를 받치고 있는 교각의 높이가 3~40미터는 족히 되 보이는데 그 생김새가 유럽에서 보았던 아치형으로 조형미가 아주 돋보였다. 게다가 배경인 주변 산에 단풍까지 들어 그 모습이 더욱 예뻐 보였다.

해설사가 승일교(承日橋)의 감춰진 유래에 대해 얘기해 주길 “그 다리의 원래 이름은 한탄교였는데, 훗날 남과 북이 절반씩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북한 김일성의 일(日)자를 붙여 부르게 됐다”고 했다.

철원에 서 있는 건축물들은 뭐하나 사연이 없는 것이 없어 보였다. 승일교의 사연을 머리에 새기며 직탕폭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직탕폭포

한국의 나이아가라 직탕폭포
직탕폭포의 첫 모습은 마치 나이아가라의 축소판 같았다. 결코 빈말이 아닌 게 우리나라 폭포 대부분은 한줄기로 물을 쏟아내는 데, 직탕폭포는 좌우 폭이 상당히 길어 80미터는 족히 돼 보였다. 떨어지는 높이는 3~5미터 정도 되는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하얀 커튼을 친듯했다.

직탕폭포 아래쪽 절벽에는 제주도에서 보았던 주상절리(柱졽節쐧)가 발달해 있었다. 감히 짐작컨대 화산이 분출할 때 만들어진 주상절리가 억겁의 세월을 지내오면서 곡류에 힘을 빌려 이처럼 아름다운 폭포를 빚어놓은 게 아닌가 싶다.

직탕폭포에서 승일교를 향해 고개를 들면 태봉대교가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번지점프 명소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양 다리를 묶고 푸른 한탄강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뉴질랜드 남섬 퀸스타운의 카와라우 다리(Kawarau River Bridge)의 번지점프를 생각나게 한다.

철원에 온 김에 나도 한번 뛰어볼까 했지만, 너무 무서워 그냥 꾹 참았다. 두 번 다시 철원에 오지 못한다면 무리해서라도 감행했을 테지만, 깃털처럼 많은 게 세월이고, 또다시 철원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다음으로 미뤘다. 누가 보면 또 자꾸 뛰어보라고 할까봐 빨리 그 자리를 피해 도피안사로 자동차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상 세계에 이르는 길 도피안사
도피안사(到彼岸寺)는 아담하지만 기상은 출중한 사찰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쓰라린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도피안사는 해방 이후 북한 영역에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무두 소실됐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사찰이 있는 곳이 남한 영역에 놓이자 1959년 육군 제15사단에서 복원해 관리해오다 삼성각(三聖閣)을 개축하고 범종각 사천왕문 등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보물 제223호 도피안사 3층석

도피안사란 사명(寺名)도 특이한데, 그 이름에는 내력이 있다.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제조해 철원읍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가던 중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불상을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사라졌던 불상은 지금 절이 있는 자리에서 안좌한 자세로 발견됐다고 한다. 그래서 도선국사가 불상이 발견된 자리에 암자를 짓고 도피안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도피안사’라는 이름에서 ‘도피안’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 ‘피안’(彼岸)에 이른다(到)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피안사 대웅전에서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을 볼 수 있는 데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철불(鐵佛)이란다.

도피안사의 앞마당에 있는 4.1m 높이의 3층 석탑은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신라계 일반 석탑과 다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생전 처음 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 작별 인사를 드리고 노동당사로 발길을 옮겼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 거대한 화산암석, 그림 같은 해안선 따라 걸으며 힐링!

☞ 문경으로 떠나는 역사 체험여행

☞ 항공기 이착륙시에도 “전자기기 사용하세요!”

☞ 시애틀 공항에서 다운타운까지 가는 가장 저렴한 방법

☞ ‘진짜 사나이’ 인기에 밀리터리 패션 인기

☞ 레하임! 예루살렘 

(참 좋은 관광뉴스 투어코리아, Tour Korea)
<저작권자(c)투어코리아.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카카오플러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에디터 초이스
투어코리아 SNS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