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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섬] 유배의 섬 ‘완도 고금도와 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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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섬] 유배의 섬 ‘완도 고금도와 신지도’
  • 글·사진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20.02.06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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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섬’ 어디까지 알고 있니?⑬ 고립의 섬 ‘유배문화 꽃피우다’

팍팍한 민중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던 유배자들도 적지 않다. 그 중 한 인물을 꼽자면 완도군에 속한 유배의 섬이고 소외의 땅이었던 ‘고금도’로 종신 귀양을 온 ‘이도재 선생’이다.

 ‘완도군’ 만든 이도재의 유배지 ‘고금도’ 

고금도는 조선시대 수많은 벼슬아치와 사대부가 고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다. 그중 이도재 선생은 완도군 설군(완도군을 처음으로 만들어 세움)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로, 격변기의 구한말, 조선시대 선비였던 그는 1884년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으로 인해 고금도로 귀양 와 8년을 살았다.

 고금대교

당시 개화파 젊은이들이 붙잡혀 감옥으로 혹은 귀양살이 갈 때, 그 역시 같은 파로 몰려 1886
년 5월 고금도로 종신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고금도 덕암리 최평우 씨의 사랑채에 머물게 된 그는 원래 시골에서 자랐기에 이곳 주민과 쉽게 친할 수 있었으며 주민이 바라는 일이나 시급히 바꿔 가야 할 일을 알아서 고쳐 나갔다.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보리의 올바른 재배법을 가르쳤으며, 고구마를 주식 대용으로 먹을 수 있음에 착안하여 보급하는 데 힘썼다. 섬 지방의 특성을 살려 김 양식 방법을 연구하고 꼬막, 바지락 등의 조개류와 해조류의 양식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896년 완도군이 설군(設郡)되면서 고금도는 완도군에 속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강진 마량과 고금도를 연결하는 고금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가 되었다. 이도재 선생의 뜻을 따라 고금도는 눈부신 발전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바다로 갈라졌던 완도 고금면과 강진 마량면이 다리로 이어져 하나가 된 것이다.

귀양살이 설움 울음소리로 퍼지다 ‘신지도’

신지도에도 ‘명사십리’가 있다. 그런데 이곳 명사십리는 ‘모래가 운다’는 뜻의 울‘명’ 자를 따고, 3.8㎞이지만 ‘십리’라는 단어를 합해 ‘명사십리’로 부르고 있다. 신지도의 명사십리가 ‘우는 모래’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부패와 사회 현실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다가 1860년 신지도로 유배온 경평군 이세보(李世輔, 1832∼1895).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을 과감하게 비판했던 그가 철종 때 외척 세도 일가의 전횡을 논하다가 이곳 신지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그는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유배의 설움과 울분을 실어 손가락이 닳도록 모래톱에 시를 쓰고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우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백사장으로 걸어 나가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귀를 기울여 보면 영락없이 그울음소리가 들린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서 울려 나오는 그 해조음은 파도가 모래에 해금을 켜듯 들려오는 신비의 울림 같은 것이다.

이세보는 천리 유배 여정과 2년 동안의 유배지 생활을 ‘신도일록(薪島日錄)’에 담았다. 또한, 이세보는 이 섬에서 아래와 같이 수많은 시조를 짓기도 했다.

<참고도서 이재언 ‘한국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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