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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로 불리던 최초의 근대식 등대 ‘팔미도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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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로 불리던 최초의 근대식 등대 ‘팔미도 등대’
  • 글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20.01.10 1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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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섬’ 어디까지 알고 있니? 이야기가 있는 섬⑫ 희망의 빛 밝히는 등대 찾아 섬 여행
팔미도등대/ 사진-인천관광공사

팔미도는 인천 중구 무의동에 딸린 섬으로 면적 0.076㎢, 해안선 길이 1.4㎞이다.

이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15.7㎞, 무의도에서 약 900m 떨어져 있다. 섬의 남쪽과 북쪽이 모래와 자갈로 연결돼 마치 ‘여덟 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다고 해서 팔미도라 불려졌다.

100년 이상 밤바다에서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 팔미도 등대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이다. 밤에 항해하는 배들에게 어둠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나타나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귀중한 존재가 팔미도 등대이다. 

이 등대가 불을 켜기까지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1883년 인천 개항을 했지만 우리나라 바다에는 등대가 하나도 없었다. 바다를 멀리한 민족이기에 등대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팔미도 등대가 세워진 시기는 1903년이며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수도의 관문인 인천항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은 것에서 비롯됐다.

 

인천항은 간만의 차이가 11m로 매우 심한데다, 수심이 얕고 해안선이 복잡해서 기반 시설을 갖추지 못해 입출항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맺기 2년 전에 일본의 선박들이 인천항을 오고가는데 암초에 부딪히고 해난사고를 자주 겪자, 조선정부에 ‘통상장정(通商章程)’을 들이대며 등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인천항구로 들어오는 관세수입의 일부를 가지고 건설비로 충당해 1902년 5월 등대건설을 시작했다. 팔미도 등대는 1903년 4월에 준공되었고, 6월 1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점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이다.

전기가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어두운 밤의 불빛은 도깨비 불빛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인도인 팔미도 섬 꼭대기에 밤마다 켜는 불빛을 도깨비불이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등대를 통과하는
우리나라 배들은 돛단배, 똑딱선이었다. 

비록 팔미도 등대는 일제의 강요에 따라 프랑스 기술자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조선인 근로자들이 이곳에 와서 대한제국의 이름으로 일을 했다. 팔미도 등대는 ‘등대지기’ 노래처럼 감상적인 불빛은 아니다.

일본과 외세의 침략자의 야간 뱃길을 인도했던 ‘제국의 불빛’이었지만, 지금은 인천항을 출입하는 모든 선박들의 안전운항을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이렇게 팔미도 등대는 어느 등대보다도 아픈 역사를 담고 태어났다.

특히 팔미도 등대는 1950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역사적인 등대이기도 하다. 당시 팔미도 등대의 등대지기들이 피난을 떠나지 않고 남아 등명기를 직접 손으로 돌려 불을 밝혔고, 맥아더 장군은 이 팔미도 등대 불빛에 의존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2002년까지 기존의 등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했고, 지금은 새로운 등대가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팔미도 등대는 바닷물에도 부식되지 않게 콘크리트와 함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해양건축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이 등대를 높이 평가해서 인천시는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했다.

<사진  투어코리아 / 참고도서 이재언 ‘한국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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