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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병과 선비들의 이야기 만나는 트레킹 코스 ‘무등산 역사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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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병과 선비들의 이야기 만나는 트레킹 코스 ‘무등산 역사길’①
  • 오재랑 기자
  • 승인 2017.12.20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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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역사길을 걷고 있는 여행객/사진=투어코리아 오재랑 기자

[투어코리아] 성균관유교문화활성화사업단에서 ‘2017년 향교·서원 문화관광프로그램’
일환으로 기세등등 여유만만, 월봉서원과 무등산 역사길을 다녀왔다.

무등산(1,187m)은 광주광역시의 아이콘으로, 광주시민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다. 이곳에 만들어진 신개념 트레킹 코스 ‘무등산 역사길’이 인기를 끌고 있다.

무등산 역사길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충장사(忠壯祠)에서 출발해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 환벽당(環碧堂) 옆 취가정(김덕령 장군 출생지)까지 갈 수 있는데, 그 길이가 6km에 이른다.

무등산 역사길을 걸으면 광주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들과 의향 광주를 이끌었던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 풀어헤쳐볼 수 있다. ‘무등산 역사길’을 걸으며 역사길 곳곳에 스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자.

무등산 역사길을 걷고 있는 여행객/사진=투어코리아 오재랑 기자

충장사(忠壯祠)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는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충장사(忠壯祠)란 이름은 정조가 내려준 충장공이라는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광주의 유명한 도로 ‘충장로’ 역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군호를 따 지은 것이다.

경내에는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돼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김덕령장군’ 의복(중요민속자료 제111호)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돼 있고, 사당 뒤 언덕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돼 있다.

▲ 충장사/사진=투어코리아 오재랑 기자

충장사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하며, 내삼문은 광해군이 내려준 익호장군을 따 ‘익호문’이라했고, 외삼문은 선조가 내려준 충용장군의 이름을 따 ‘충용문’이라 했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용맹함을 떨쳤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은 이런 김덕령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군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하고, 3년 후인 선조 28년에는 고성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김덕령장군은 거제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해 진해, 고성 지방을 방어하는가 하면,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군을 무찌르기는 공적을 쌓았다. 그러나 선조 29년 김덕령 장군이 반란을 진압한 이몽학과 내통한 충청도 순찰사의 무고로 투옥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다.

김덕령 장군은 1661년(현종 2)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됐다. 이후 정조 12년인 1788년에 장군의 드높은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 배향하는 한편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

▲ 충장사 / 사진=투어코리아 오재랑 기자

풍암정(楓岩亭)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15호로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동생 김덕보가 지은 정자다. 김덕보는 큰형인 덕홍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둘째형인 김덕령 장군이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충효동 원효 계곡 하류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에 들어갔다.

정자 앞쪽으로 원효계곡이 흐르고, 정자 양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이끼를 품은 채 놓여있다. 우측엔 수백 년이 지난 전나무가 뿌리를 내려 독야청청하다. 전면 좌측에는 전나무보다 더 오래된 소나무가 원효계곡을 향해 뉘어져 있다.

특히 주변에는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사진=투어코리아 오재랑 기자

환벽당(環碧堂)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조선 중기 나주목사를 지낸 문신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다. 그의 대표 제자로 송강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환벽당은 소쇄원, 식영정과 함께 일동삼승(一洞三勝: 한 골 안에 있는 세 명승(名勝)으로 불린다. 서하당 식영정 주인 김성원은 김윤제의 조카이고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는 처남 매제지간이다.

▲ 환벽당/ 사진=투어코리아 오재랑 기자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환벽(環璧)이란 ‘푸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현판에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를 볼 수 있다.

환벽당에서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기이하다. 14살의 정철이 담양에 잠시 내려와 생활하던 어느 날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환벽당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환벽당에서 낮잠을 청하던 김윤제는 창계천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다 깨어나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정철)이 멱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김윤제는 정철을 데려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면서 영특함을 알아보고, 정철을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했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들을 만나 학문과 시를 배웠고, 김윤제는 정철을 외손녀와 혼인을 시켜 27세에 관계로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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