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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일본에 한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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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일본에 한류가 있었다!
  • 유경훈·김응구 기자
  • 승인 2016.03.2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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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발자취 따라가는 일본 여행
▲ 조선 통신사의 종착지 도쇼구(東照宮): 일본 도치기현 닛코(日光)에 신사로 남무 앞쪽에 인조가 하사한 범종이 보인다.

[투어코리아] 200~400(1607~1811년)전에도 일본을 향한 한류스타들이 있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바로 그들이다.

비록 지금과 형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양(漢陽)을 출발해 일본의 수도 에도까지 약 3,000㎞를 가면서 일본 백성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또 각 일본 내 각계각층에 경제, 문화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감히 조선통신사를 ‘한류의 뿌리’, 즉 ‘한류의 개척자’라 부르고 싶다. 지난 1월 일본국제관광진흥기구(JNTO)의 협조를 받아 3박 4일 일정으로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그들의 숨결을 느껴봤다.

▲ 츠루가오카 하치만구는 가마쿠라시의 상징물이다.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대표한다.

한류 ‘조선통신사’정거장 류호지

조선통신사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행 첫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류호지(龍寶寺)’가 있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마쿠라시(鎌倉市)다. 류호지는 1711년 조선통신사가 에도(옛 도쿄)에 도착하기 네 번째 전의 숙박 장소였던 곳으로, 지은 지 300년이 넘
은 건물임에도 워낙 튼튼하게 지어 관동대지진에도 망가지지 않았다 한다.

류호지가 있는 가마쿠라는 800년 역사를 간직한 고도로, 12세기 말부터 150여 년간 일본 정치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그러나 에도시대(1603~1867년)로 접어들면서 농업과 어업 중심의 한촌(寒村)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이후 1889년 철도가 들어오고 1912년 가마쿠라 관광철도가 생기면서 관광지로 변모했다.

▲ 1711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가 에도로 가는 가는 과정에 숙소로 사용했던 ‘류호지’

가마쿠라를 말할 때 가마쿠라막부(幕府)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최초의 무사(武士)정권으로 1185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수립했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에는 가마쿠라시의 상징인 ‘츠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 八幡宮)’를 찾았다. 1063년 미나모토 요리요시 가문의 수호신인 하치만과 무인들의 장수와 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전쟁의 신’ 오진천왕(応神天皇)과 진구황후(神功皇后) 등을 모시고 있다.

하치만구의 본당은 1828년 제11대 가마쿠라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대표한다고 한다. 신사 왼쪽 입구쪽으로 ‘다이코바시(太鼓橋)’라는 아치형 돌다리가 보이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남자는 출세길이 열리고, 여자는 순산한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 1711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가 에도로 가는 가는 과정에 숙소로 사용했던 ‘류호지’

 

일본을 변화시킨 고구려 정신

여행 이튿날 가나가와현 오이소초(大磯町)에 있는 ‘다카쿠(高來)신사’ 방문했다.

다카쿠 신사는 1897년까지 ‘고마신사(高麗神社)’로 불렸던 곳으로, 메이지(明治) 시대에 ‘높을 고(高)’에 ‘올 래(來)’를 쓴 ‘다카쿠’로 바뀌었다. 이곳은 애초에 사찰이었는데, 아마도 메이지 정부가 신불(神佛) 분리정책을 펼칠 때 그리 된 듯 보인다. 신사 뒤편으로는 고마야마(高麗山)가 든든히 버티고 있다.

다카쿠 신사는 668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후 오이소로 넘어온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을 기리기 위한 신사로, 그는 이 곳에서 무사시쿠니(武藏國)의 고마군(高麗郡) 군사(郡司·군수)로 있다가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다.

▲ 가나가와현 오이소에는 고구려인들의 흔적이 군데군데 많이 남아있다. 다카쿠신사의 처음 이름은 ‘고려신사’였다. 궁사 와타나베 류지 씨와 본당 뒤에 ‘고려산’이 보인다.

“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인들은 교토(京都), 나라(奈良) 등의 간사이(關西)지방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천황한테 일본에서 살아도 되는지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약광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간토(關東) 지방으로 이동해 살다가 다시금 사이타마현의 고마신사로 거처를 옮겼지요.”

▲ 고려신사 정문

다카쿠신사의 궁사(宮司·주지스님 격)인 와타나베 류지(渡辺 幸臣)씨는 “고구려인들은 이 곳을 떠났지만 지명(地名)이나 문화, 그들의 발자취 등은 현재도 곳곳에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오후에는 사이타마현(埼玉縣) 히다카시(日高市)에 위치한 ‘고마(高麗)신사’를 찾았다. 고마신사를 알기 위해선 고마군의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인들은 쫓기듯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그 당시 넘어온 고구려인은 1,799명이나 됐다. 그들은 이곳에서 도래인(渡來人·5~6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으로 삶을 살았고, 일본인들은 이들을 ‘고마히토(高麗人)’라 불렀다.

▲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마신사(高麗神社)’는 고구려 왕족이었던 약광(若光)을 모시고 있는 신사다. 이 신사에서는 약광의 직계가족들이 궁사를 계속 잇고 있다. 고마 후미야스 궁사 역시 마찬가지다. 뒤편으로 그의 선조들이 살았던 가옥이 보인다.

이후 716년 야마토(大和) 정권은 무사시쿠니(武藏國)에 고마군을 설치하고, 간토(關東)지방 일원에 살던 고구려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리고 초대 군사(郡司·군수)에 고구려 왕족인 약광(若光)이 취임했다.

약광은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庶子)다. 고마군은 고구려인들의 개척정신을 통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었다. 도로와 농지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산업이 생겨나는 등 1200년 동안 고마군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완전 딴세상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1896년(명치 29년) 고마군이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되면서, 그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다.

2016년은 고마군이 설치된 지 1300년이 되는 해다. 히다카시는 올해 고구려인들이 그 땅에 구축한 소중한 역사와 문화에 감사하고 미래에도 꾸준히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마군 건군 13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나섰다.

고마신사는 약광을 명신(明神)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으며, 약광의 직계 자손들이 대를 이어 궁사를 맡고 있다.

▲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마신사(高麗神社)’의 '고마 후미야스 궁사'. 그는 고구려 왕족 약광의 60대손이다.

고마신사는 일본 총리와도 밀접하다. 이곳에서 약광을 참배(參拜)했던 정치가 중 사이토 마코토(齋藤実),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등 6명이 총리에 올랐다 한다. 이런 연유로 고마신사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출세의 신사’로 불리기도 한다.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51) 궁사는 “고마신사는 방문객이 연간 50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사이타마현에서 우수한 신사 중 하나”라며, “특히 정초가 되면 3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온다”고 소개했다.

고마신사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쇼덴인(聖天院·성천원)’이라는 사찰이 나온다. 약광의 묘가 안치돼 있는 곳으로, 약광의 세번째 아들 세이운(聖雲)과 손자 코우진(弘仁)이 창건했다. 세이운은 출가해 승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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