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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石따라 떠나는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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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石따라 떠나는 역사여행
  • 조민성 기자
  • 승인 2010.12.06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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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몇백년 역사 이야기 담은 비석 많아

지하철을 타고 혹은 걸어서 서울 곳곳에 숨겨진 비석을 찾아가보면 색다른 서울 역사여행을 할 수 있다. 서울시 전역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비석들, 우리가 무심코 지나는 이 작은 돌판 위에 몇백년이나 되는 역사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글비석, ‘이윤탁 한글 영비’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이윤탁한글영비’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구한말까지, 한글로 새겨진 4개의 비석 중 유일하게 건립연대를 알수 있는 최초의 한글비석이자, 조선 전기에 세워진 유일한 한글비석이다.

그래서 그 자체가 중세 국어와 서체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주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커 2007년 서울시 문화재에서 보물 제1524호로 승격되었다.

조선 중종 31년(1536년) 문신 이문건이 부친의 묘앞에 세운 이 비석에는 묘주명과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양 옆면으로 ‘신령한 비라 쓰러뜨리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를 글(한문)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라는 훼손 경고문구가 쓰여 있어 눈길을 끈다.

하마평의 유래가 된 ‘하마비’는 대개 궁궐, 궁집, 문묘 등 국가 주요시설 앞에 세워 그 곳을 지나갈 때는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으로 종로구 훈정동 종묘 입구에‘하마비’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즉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글이 적혀 있어, 말을 타고 가던 사람이 말에서 내려 잠시 일을 보러 간 사이에 마부들끼리 무료함을 달래느라 잡담을 나누게 되는데, 이때 그들이 모시는 상전이나 주인 등의 인사이동·진급 등에 관한 얘기도 곧잘 나왔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가리켜 ‘하마평’이라 하던 것이 일상용어로 굳어져 오늘날 관리의 이동이나 임명 등에 관한 풍설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게 됐다.

태종13년(1413) 최초로 종묘와 궐문 앞에 표석을 놓았는데 이것이 후일에 하마비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이후 경복궁, 덕수궁, 동묘 등 왕이나 고관이 거처하는 대부분의 곳에 세워져 역사적 의미를 지켜오고 있지만, 외부에 노출되어 오랜 세월 비바람을 그대로 맞은 탓인지 홀로 쓸쓸한 침묵만 지키고 있다.

이와 함께 병자호란시 청에 패배해 한강변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한 시련의 역사를 되새기는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송파구 석촌호수에 있다.

삼전도비는 국치라 여겨져 1895년(고종32) 매몰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다시 세워지고, 광복 후 1956년 주민들이 이를 치욕으로 여겨 다시 땅속에 묻었다가 1963년 홍수로 재발견됐고, 2007년의 비석 훼손사건 이후 371년만인 올해 4월에야 지금의 자리에 안식을 취하게 됐다.

굴욕적인 강화협정 이후 청태종은 그의 공덕을 자랑하고자 삼전도비를 세우도록 했다. 1639년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45일만에 항복한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것으로 전해지는 삼전도 굴욕의 가슴아픈 역사만큼이나 비석의 역사도 시련으로 얼룩져 있다.

삼전도비는 비석의 앞면 왼쪽에는 몽골어, 오른쪽은 만주어, 뒷면에는 한자, 3개 언어가 하나의 비석에 동시에 새겨진 유례없는 비석으로도 의미가 크다.


치욕의 역사도 담겨

은평구에 있는 보물 제1462호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는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무른 별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준다.이 비석은 숙종이 직접 글씨를 써 세웠고 조선 초기양식 전통과 후기 석비양식의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대문구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뒷동산에 자리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1호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는 임진왜란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군 양호의 공을 기리고 있다. 양호장군을 기리기 위한 비는 모두 4기인데, 헌종1년에 세워진 것은 서울 대신고등학교에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3기는 선조31년(1598)~영조40년(1764)때 만들어졌다. 양호거사비를 제외한 나머지 2기의 행방은 현재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임금이나 공신의 평생업적을 기록해 후손 등이 무덤가에 함께 세워둔 ‘신도비’는 다양한 사연으로 서울시 전역에 분포해 있다. 동작구 사당동 까치산공원에 가면 3개의 신도비를 둘러볼 수 있다.

공원내 임당공 묘역에는 조선 중기의 명신 ‘임당공 정유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를 위시하여 인조 때 좌의정까지 오른 아들 ‘수죽 정창연의 신도비’와 효종 원년 형조판서를 지낸 손자 ‘제곡 정광성의 신도비’가 함께 조성되어 동래정씨 일가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중랑구 망우동(용마공원 앞)에는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병자호란때의 공적으로 우·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고 임명된 지 열흘만에 세상을 떠난 신경진을 기리고자 숙종 9년(1683년)에 세운‘신경진신도비’가 있다.


관악구 신림동에는 명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과 영중추부사를 지낸 ‘정정공강사상묘역’의 비(숙종 39년, 1713)가 있고, 남현동에는 이항복과 김장생의 제자이며 인조 5년(1627) 정묘호란때 병조참판으로 청나라 사신과 교섭하여 화의를 이끈 이경직을 기리는 ‘효민공 이경직 묘역’의 비(현종 9년, 1668)가 있다.

서대문구 북가좌동에는 조선 영조 때 오위도총부를 지낸 화산군의 생애와 공적을 기리는 ‘화산군이연신도비’가 있다. 영조 23년(1747) 화산군의 아들 낙창군이 세우고, 영의정인 송인명이 비문을 지었다. 지금은 주변이 주택가라 화산군의 묘소를 확인할 수 없다.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8호 ‘금암기적비’는 조선 정조가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인 영조의 옛 일을 회상하며 세운 석비이다.

비문은 영조가 세자시설인 경종 원년(1721)에 있었던 내용을 담고있다. 아버지인 숙종의 생신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 덕수천변에 머물며, 이곳의 역사 관리가 소도둑을 잡았다가 사정을 듣고 도둑을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것을 본받아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시 이곳은 의주로 가는 역의 건물을 사용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역사건물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있다.

종로, 민족운동 정신 기리는 비석 많아

도심 한복판인 종로구 광화문 사거리 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과 그 안에 세워진 사적 제171호 고종즉위 40년칭경기념비 또한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특히, 종로구에는 3·1운동 기념비, 만해 한용운 시비 등 일제시대 민족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비석이 있다. 종로2가 탑골공원에는 화강석 동판으로 된 3.1독립운동 비석판과 3.1운동 독립선언서의 인쇄소로 잘 알려진 보성사 기념비, 3.1정신 찬양비, 탑골공원 사적비 등이 있으며,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시비도 세워져 있다.

백호 서울시 행정과장은 “관광지나 박물관에 있어 일부러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문화재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비석만 관심있게 보아도 색다른 역사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집 근처 비석을 통해 아이에게 역사에 대한 흥미를 심어주어도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

(참 좋은 관광정보 투어코리아, Tou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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