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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선조들 삶 담긴 ‘옛길’ 6곳 명승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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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선조들 삶 담긴 ‘옛길’ 6곳 명승 지정 예고
  • 이주현 기자
  • 승인 2021.09.1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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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갈재 정상. 사진=문화재청
삼남대로 갈재 정상. 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삼남대로 갈재‘,  ’삼남대로 누릿재‘, ’관동대로 구질현‘,  ’창녕 남지 개비리‘, ’백운산 칠족령‘, ’울진 십이령‘ 등 총 6개소의 옛길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6개소의 옛길은 문화재청의 ‘옛길 명승자원조사’ 결과와 관계전문가, 지방자치단체의 추천을 받아 발굴한 옛길 잠재자원 21개소 중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역사 문화적 가치, 경관적 가치, 생태적 가치, 활용 가치 등을 고려해 명승으로 지정 추진됐다.

과거 옛길은 고려 시대 통치의 목적으로 건설된 역로(驛路)로 조선 시대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중요한 시설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물자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용이 빈번한 도로가 대로로 승격되며 9개 대로 체계가 완성됐다. 

백운산 칠족령. 사진=문화재청
백운산 칠족령. 사진=문화재청

삼남대로, 관동대로, 영남대로, 의주대로 등의 간선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였으며, 점차 민간교역로의 기능을 맡게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옛길이 신작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길이 확장되고 가로수가 세워지면서 본래 모습을 잃었다. 남은 옛길마저 후대에 임도(林道)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우가 많아 보존이 요구됐다.

  옛길은 ‘예전부터 다니던 길’ 또는 ‘옛날에 존재했던 길’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명승으로 지정되는 옛길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의 의미만이 아닌 인간과 자연의 부단한 교감의 결과이자, 나아가서는 길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문화, 역사, 전통 등을 모두 포함하는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어 선조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반석이 깔린 옛길. 사진=문화채청
반석이 깔린 옛길. 사진=문화채청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으로 가는 길로, 삼례-전주-태인-정읍-나주-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약 970리 길을 말한다.

‘삼남대로 갈재’는 고려 시대 현종이 나주로 몽진할 때 이용한 삼남대로의 대표적 고갯길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노령(蘆嶺)’, ‘갈령(葛嶺)’, ‘위령(葦嶺)’ 등으로 표시돼 있다. 

이 길은 전북도와 전남도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조선 시대 많은 문인들이 지났다는 기록을 통해 이곳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송시열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사되기 전 마지막 여정이 갈재였으며, 동학농민군이 장성에서 대승을 거두고 곧바로 정읍으로 향하기 위해 갈재를 넘었다고 한다.

관동대로 구질현의 V자형 지형.사진=문화재청
관동대로 구질현의 V자형 지형.사진=문화재청

‘삼남대로 누릿재’ 는 조선 시대 강진과 영암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로 ‘광여도’ 등에 ‘황치(黃峙)’로 기록되어 있고, ‘황현(黃峴)’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약용, 최익현, 송시열, 김정희 등 많은 문사들의 방문기록이 내려오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특히,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지내며 월출산과 누릿재를 여러 시와 글로 남기기도 했다.  

‘관동대로’는 한양에서부터 양평-원주-강릉-삼척을 거쳐 울진 평해까지 약 885리에 이르는 도로다. 

‘관동대로 구질현’은 강원도에서 한양, 수도권으로 향하는 관동대로의 일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질현(仇叱峴,)’이라 기록돼 있고, ‘광여도’에는 ‘구존치(九存峙)’로도 표기돼 있다. 

지형이 험해 ‘아홉 번은 쉬고 나서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하여 ‘구둔치’라고 불리기도 했다. 

1940년대 중앙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에도 주민들은 양동면 시장이나 지평시내를 갈 때에 기찻삯을 아끼기 위해, 또는 소나 말 등을 기차에 싣고 갈 수 없어 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창녕 남지 개비리와 낙동강.사진= 문화재청
창녕 남지 개비리와 낙동강.사진= 문화재청

‘창녕 남지 개비리’는 박진(朴津)과 기강(歧江)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옛길로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길로 애용됐으며,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나와 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으로, 선조들은 과거 낙동강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아 발아래에는 강물이 차오르고, 아슬아슬한 벼랑길임에도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옛길에 올랐다고 한다.  

‘백운산 칠족령’은 평창과 정선을 연결하는 대표적 고갯길로 순조 대 편찬된 ‘만기요람’에 동남쪽의 통로로 기록돼 있고, 문희리(文希里)를 거쳐 동면내창(東面內倉)으로 가는 경로가 ‘평창군 오면 지도’에 구체적으로 표시돼 있다.

이곳은 동강(남한강 상류)에 이르는 최단 경로로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강을 통해 소백산 일대 금강송을 서울로 운송하던 떼꾼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울진 십이령 입구(내성행상 불망비).사진 문화재청
울진 십이령 입구(내성행상 불망비).사진 문화재청

‘울진 십이령’은 두천원(斗川院)을 기점으로 봉화 인근 내륙의 생산품과 울진 인근의 해산물을 교역하던 십이령의 일부로, 샛재·바릿재 등 옛 십이령의 주요지점이 잘 남아있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에 걸쳐 위치한 12개의 큰 고개를 말하며,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험준한 길로 사대부보다는 주로 상인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인행(李仁行, 1758~1833)은 ‘신야집(新野集)’에 유배지까지의 여정 중 겪었던 험한 길 중 십이령을 첫 번째로 꼽았고, 이곳에서 어염(魚鹽)을 파는 상인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던 모습을 남겼다.

실제 울진 십이령은 울진 내성행상 불망비, 성황당과 주막 터, 현령 이광전 영세불망비 등 보부상과 관련된 역사문화적 요소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옛길 6개소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최종 지정할 계획이다. 

또한 옛길 6개소 보유지역의 관광 활성화에 이바지하고자 명승 옛길 활용 콘텐츠를 개발해 해당 지자체와 관련단체에 보급·공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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