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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눈물 마를 새 없던 영월 '청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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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눈물 마를 새 없던 영월 '청령포'
  • 유경훈 기자
  • 승인 2021.04.30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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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청령포

‘지붕 없는 박물관 고을’. 강원도 영월군의 또 다른 별칭(別稱)이다.

장구한 역사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10경(景) 등 볼 것이 많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서강이 곡류해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청령포(명승 제50호)와 ‘영월 장릉’(사적 제196호)은 단종의 슬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으로, 영월 단종문화제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찾아봐야 할 곳이다.

청령포는 강원도 동·남·북 삼면을 서강이 에워싸고, 서쪽은 육육봉이라는 험준한 암벽이 청령포를 감시하는 듯 불쑥 솟아 있다. 산적이 아니고서야 탈출하기 쉽지 않은 지형이다.

열두살 어린 나이에 조선 6대 임금에 오른 단종은 3년 만인 1455년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강제 선위(禪位)하고, 15세의 나이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돼 이곳에 유배당했다.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만 한다. 서강은 깊지 않고 강폭도 기껏해야 30m 정도에 불과하지만......

단종 유배지 청령포
단종 유배지 청령포

배에서 내려 강변 자갈밭을 걸어 수림지(산림청 2004년 천년의 숲 지정)로 들어가면 수십~수백년 된 거송들 사이로 단종이 머물던 어소(御所)가 나타난다. 글 읽는 단종과 그를 알현하는 선비, 살림을 챙기는 궁녀들을 재현해 놓아 당시 단종의 유배 생활의 단면을 짐작하게 한다.

청령포 어소
청령포 어소

수림지 중앙에 있는 커다란(수령 600년 추정.높이 30m)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제349호)은 Y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다.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이 그 틈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래곤 했다고 한다. 관음송이란 이름은 단종의 유배 모습을 지켜보고(觀), 때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데서 유래됐다.

단종어소
단종어소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는 작은 돌탑(망향탑)이 하나 보인다. 단종이 한양과 그곳에 두고 온 왕비 그리며 쌓았다고 하는데,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인 듯 하다.

청령포와 마주한 도로가 솔숲에는 단종이 마실 사약을 들고 왔던 금부도사(禁府都事) 왕방연이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었다는 시비(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님 여희옵고~)가 서있다.

왕방연 시비
왕방연 시비

영월장릉

영월장릉(寧越莊陵) 단종이 영면한 곳이다. 조선왕릉 중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릉이다. 조선 시대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거리인 성저십리(城底十里)에서 100리 거리인 교(郊) 사이에 마련되도록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영릉은 그 관례를 벗어났다. 청령포에 유배돼 죽임을 당해 아무도 돌보지 않은 주검을 호장 엄흥도가 수습해 현재 장소에 무덤(암매장)을 썼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단종 사후 241년이 지난 숙종 1698년에 단종이 노산군에서 복위되면서 왕릉으로 정비됐다.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한 것이다.

장릉
장릉

영월 장릉은 곡절이 있다 보니 평안(?)하게 조성된 조선 시대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을 배치된 여느 왕릉들과 달리 ‘ㄱ’자 형태이고, 왕이 아닌 사람들의 비석과 위패를 모신 점이 차이가 있다.

장릉에서는 매년 4월이면 단종을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린다. 단종을 떠나보내는 국장은 550년이 흐른 지난 2007년에야 치러졌다. 영월군민들은 조선조 27대 임금 중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임금인 단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백성의 마음을 담아 국장을 치러주었다. 이후 단종문화제 때마다 단종 국장을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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