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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발자취 따라 ‘팔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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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발자취 따라 ‘팔금도'
  • 글·사진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20.09.2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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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의 가치, 호국의 함성따라 신안ㆍ진도 힐링여행③
동아리 교사들과 함께 떠난 2박3일 도서 탐방
신안 팔금도 거사도 노둣길에서 본 목포 방면 일출 /사진 신안군 제공
신안 팔금도 거사도 노둣길에서 본 목포 방면 일출 /사진 신안군 제공

1597년 봄에 일어난 정유재란! 그해 음력 9월 16일, 왜군의 2백여 척과 이순신 장군의 12척이 맞붙는다. 장군은 바다를 알았고, 명량의 특이함을 파악했다. 세계해전사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명량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장군은 상처 입고 신음하는 군사들을 보면서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안편도(신안군 팔금도)에서 20여 일을 보낸 뒤, 고하도(지금의 목포 소속)를 거쳐 고금도에 진을 꾸렸다.

일제 때 소작쟁의로 알려진 암태도 바로 옆에는 팔금도가 있다. 이 섬의 입구에 ‘군영소’라는 표지석이 자리한다. 이곳은 장군께서 1597년 10월 열하루부터 스무아흐레까지 머문 곳이다.

팔금도 군영소
팔금도 군영소

장군은 수시로 159m의 채일봉에 올라가 해상을 탐방하며 언제 있을지 모를 전투에 대비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밤바다를 보며 솔직한 심정이 담긴 시를 남겼고, 나흘째 되던 날에는 왜군과 싸우던 막내아들의 비보를 듣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곳 팔금도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보살펴 드림으로 인해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근의 크고 작은 섬에 군관을 보내 소금을 모으는 등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명량에서 참패한 적들이 아산을 찾아가 장군의 본가를 포함해 마을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에 있던 막내아들 면은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적군과 싸우다 복병의 칼을 맞아 젊은 나이에 순국한 것이다. 장래 자신의 뒤를 이으리라 각별한 기대를 해온 자식이었기에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추측하고도 남으리라. 이 소식을 접한 장군은 눈물을 지으며 코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후 마음을 다잡은 장군은 진지를 서해에서 남해로 옮기며 다음을 준비했다.

팔금도군영소
팔금도 군영소 

군영소 표지석의 글귀를 천천히 읽고 난 뒤 우리 일행은 장군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군사들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어떤 분은 초등학교 때 불렀다는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우리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를 조용히 읊조리기도 했다.

팔금도 유래석
팔금도 유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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