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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깔끔히 벌초 마친 방랑시인 김삿갓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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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깔끔히 벌초 마친 방랑시인 김삿갓 묘소
  • 유경훈 기자
  • 승인 2020.06.08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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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묘
방랑시인 김삿갓 묘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1807~1863)은 안동김씨로 순조 때 지금의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김병연은 글공부를 좋아하고 시(詩)를 잘 지었다고 한다.

김병연은 20살이 되던 해 강원도 영월 관아에서 치러진 백일장에 응시, 장원급제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백일장 시제는 ‘가산 군수 정시를 찬양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을 규탄하라’는 것이었고, 김병연은 (김익순에 대해)‘너의 치욕스러움은 만 번 죽어 마땅하다’며 통렬하게 질타하는 싯귀로 장원급제했다.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문학관

김병연은 집에 돌아와 장원급제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장원급제를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눈물을 흘렸다.

김병연이 장원급제할 수 있었던 시제와 관련, 집안에 말못할 곡절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김병연 어머니 그  이야기 보다리를 장원급제한 아들에게 풀어헤쳤다.

사실 김병연이 시로 통렬히 비판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그의 조부였다.
김병연이 다섯 살이 되던 해인 순조11년(1811) 12월 평안도에서 홍경래가 정감록 사상을 근거로 삼아 대규모 난(亂)을 일으켰다.

김삿갓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난고 김삿갓(김병연) 유적지
김삿갓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난고 김삿갓(김병연) 유적지

홍경래의 반군은 거병한지 열흘 만에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개 지역을 손아귀어 넣어 조정을 얼어붙게 했다.

이 과정에서 시제에 등장했던 또 한 사람 ‘가산 군수 정시’는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천부사 김익순은 스스로 자신을 묶고 항복해 버렸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홍경래의 난은 관군에 의해 진압됐다.

그 때 김익순은 마치 자기가 싸운 것처럼 꾸미기 위해 1000천냥을 주고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김창시의 목을 구입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지 않아 그의 모사는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 일로 조부인 김익순은 처형되는 등 김병연 가문은 멸족 위기를 맞았다. 이어  부친이 화병으로 죽자 김병연은 형(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당시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대단했던 터라 김병연 가문은 멸문을 피하고 폐족으로 사면될 수 있었다.

김삿갓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난고 김삿갓(김병연) 유적지
김삿갓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난고 김삿갓(김병연) 유적지

이후 김병연 어머니는 집안의 폐망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금의 강원도 영월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 공부를 열심히 시켜 김병연이 장원급제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야기는 장원급제를 기뻐하던 김병연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 그 자체였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김병연은 좌절하고, 또 조부를 욕했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책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됐다.

김삿갓의 행적을 그림으로 만나는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의 행적을 그림으로 만나는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병연은 전국을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해 묻혔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들이 지금의 장소로 이장해 유지되고 있다.

김병연 묘가 있는 곳은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897-2. 원래 이곳의 명칭은 ‘하동면’이었는데, 김삿갓 묘가 발견되고 나서 영월군은 관광 활성화를 위해 김삿갓면으로 변경했다.

김삿갓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난고 김삿갓(김병연) 유적지
김삿갓 문학상 수상자들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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