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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섬]최적의 유배지 ‘제주도와 추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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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섬]최적의 유배지 ‘제주도와 추자도’
  • 글·사진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20.02.1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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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섬’ 어디까지 알고 있니?⑬ 고립의 섬 ‘유배문화 꽃피우다’
제주도 성산일출봉과 한라산
제주도 성산일출봉과 한라산

제주도는 임금이 사는 한양에서 가장 멀 뿐 아니라 거대한 바다와 험한 파도로 가로막혀 있어 유배지로는 최적지였다.

제주도는 약 100년 동안 몽고의 직속령이 되어 지배를 받아 왔다. 몽고는 고려 왕조의 위협이 될 만한 170여 명을 고도(孤島)인 제주도로 유배시킨다. 바로 이것이 제주도 유배의 시작인 셈이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에는 약 2백여 명의 선비들이 험난한 바다를 건너서 제주도로 귀양길에 올랐다. 제주도 유배인 2백여 명 가운데 학자와 정치인 등 대표적 인물은 49명인데 그 중 대정현에 34명, 제주목에 5명, 추자도와 정의현에 각각 4명, 녹도(鹿島)에 2명이 유배되었다. 

귀양이라는 형벌은 거의 정치적인 이유였다. 과거에 급제하면 집안이 번성해지고 권세를 누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어 귀양이 결정되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한양을 떠나야 했다.

지금의 감옥에서는 의식주가 무료이지만, 옛날의 귀양인들은 의식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양반 주제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귀양살이는 고달팠다. 특히 제주도는 비중이 있는 유배인들과 종신형에 처해진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된 유명인으로는 광해군과 김정희가 있었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 김정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 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추사는 대정현에서 울타리가 쳐진 집에서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보통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데 환경이 아주 가혹했지만 여기서 추사는 특유의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1844년에는 인생의 최고작품인 세한도(국보 180호)라는 작품을 남겼다. 

광해군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귀양지도 제주도이다. 1873년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에는 외무대신 박영효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 외에도 ‘제주풍토록’의 저자 충암 김정,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부인도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조선말에는 유배인이 60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써 제주지역의 학문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정조 때의 안조환은 국고금을 축낸 죄로 34세 때 추자도에 귀양을 갔다. 1년 4개월 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자신이 지은 죄를 눈물로 회개하는 내용을 애절하게 읊은 ‘만언사’라는 가사(歌辭)를 창작했다. 이 작품은 유배문학에 속하는 다른 가사들에 비해 자신의 체험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밝혀 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참고도서 이재언 ‘한국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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