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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자취 따라 섬 여행...또 다시 찾게 되는 신비의 섬 ‘우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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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자취 따라 섬 여행...또 다시 찾게 되는 신비의 섬 ‘우이도’
  • 글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19.10.16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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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섬’ 어디까지 알고 있니?이야기가 있는 섬⑨

정약전 선생과 한국의 하멜이라 일컫는 홍어장수 문순득 선생의 발자취가 있고, 3개의 해수욕장과 80m 높이의 신비롭기 짝이 없는 모래언덕 등이 있는 우이도.

27개 섬으로 이어진 우이군도의 주도인 ‘우이도’는 신안군 도초도의 새끼섬으로, 도초도와는 동북쪽으로 8km,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우이도는 동양 최대라고 알려진 80m 높이의 모래언덕이 가장 유명하다.

▲ 우이도 모래언덕풍성사구

성촌해변과 돈목해변 사이에 있는 이 모래산은 비와 바람, 모래가 어우러진 풍성사구(風成砂丘)로, 세월 따라 비와 바람, 파도를 맞으며 점차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모래가 모래언덕에 쌓이면 한쪽에서 침식작용이 일어나고 다시 퇴적하는 자연의 신비를 이곳에서 절감할 수 있다. 신비로운 모래언덕을 와본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일렁였다.

이 거대한 모래언덕은 마치 사막처럼 커다란 사구가 형성돼 있는데, 돈목해변에서 바라보면 훨씬 높아서 사구의 높이를 실감할 수 있다. 사구의 수직고도는 약 50m, 경사면의 길이는 약 80m다. 경사도는 70도가 넘는다는 둥 과장되게 전해져 왔으나 실제로는 32~33도 안팎이라고 한다.

현재 이 모래언덕은 침식이 심해 탐방객들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사실, 우이도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이 모래언덕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진작가들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우이도라는 섬 이름도, 모래언덕이라는 것도 생소하게 여길 만큼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이다.

▲ 우이도 전경

또한 우이도에는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두 명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 ‘자산어보’로 유명한 정약전과 문순득이다. 조선시대의 학자 손암 정약전은 천주교도 탄압이 있었던 신유사옥 당시 이곳으로 유배돼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이도라는 외딴 섬으로 유배 온 정약전은 이곳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고, 바다에 가 해초며 조개, 소라와 전복 등 이 곳의 생태를 조사해서 총 227종의 어족연구서인 ‘자산어보’를 남긴 것이다. 회갑의 나이가 가까워졌을 무렵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숨을 거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로운 섬에서 쓸쓸하게 죽어 간 그의 주검은 온 섬사람들의 애도 속에 꽃상여 대신 배를 타고 고향길에 올랐다고 한다.

▲ 우이도 진리선착장 문순득동상

문순득(1777~1847)은 ‘표해록’의 저자다. 유구 및 여송 표류기라는 부제를 단 이 표해록은 주인공 문순득 을 포함한 우이도 주민 6명이 표류해 유구, 곧 오키나와 그리고 필리핀까지 가서 겪은 일들을 글로 적은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얘기하자면, 이들이 돌아온 후에 정약전에게 말로 전해 글로 남기게 됐다.

▲ 우이도 진리마을어부돌담길

또 모래언덕의 반대편, 즉 섬의 동쪽 진리라는 마을 앞에는 튼튼한 방파제가 포구를 둘러싸고 있다. 이 곳에선 우리나라에서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 포구시설인 문화재로 지정된 ‘우이도 옛 진리선창’을 만날 수 있다.

1745년에 축조된 선착장으로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잘 보존돼 있다. 선창은 길이 63m, 높이 3m, 폭 1.6m 규모의 석축으로 현재도 선박의 안전한 피항처로 활용되고 있다. 선창의 중건시기를 알려주는 석비 비문에는 조선조 1745년(영조21년)에 마을주민 25명이 참여했다고 기록돼 있다.

▲ 우이도 진리옛날선착장

<사진/신안군 제공. 참고도서 이재언 ‘한국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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