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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섬②-문학(소설·시조·가사)의 섬을 찾아서...남해 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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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섬②-문학(소설·시조·가사)의 섬을 찾아서...남해 노도
  •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수필가)
  • 승인 2019.03.18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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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섬’ 어디까지 알고 있니?

섬엔 무수한 이야기가 서려있다.
섬을 지켜온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고
과거 유배된 지식인들의 정수도 녹아 있다.
그래서 섬은 예술인들의 영감을 자극,
문학의 단골 소재가 되어왔다.
올해 보다 특별한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문학의 섬’을 찾는 여정은 어떨까.

 

서포(西浦)의 숨결이 살아 있는 섬 ‘노도(櫓島)’

경남 남해군에 있는 작은 섬 ‘노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西浦)’ 김만중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다. 섬 중의 섬으로 통하는 ‘노도’는 한양에서 먼 땅인 남해에서도 다시 남쪽에 있는 외딴 섬으로, 서포의 유배지였다. 아버지 없이 자란 서포는 절해고도 ‘노도’에서 그 한을 담아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특히 서포는 조선 숙종 시대 때 서인(西人)으로 대단한 문장력을 자랑했던 학자이자 직언을 잘 하던 신하로, 그의 생애 중 세 번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강원도 금성(지금의 고성)과 평안도 선천에 이어 ‘노도’가 마지막 유배지였다.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작품이라고 하며, ‘사씨남정기’나 ‘윤씨행장(行狀)’, ‘서포만필’ 등은 모두 이곳 노도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 국문 소설 선각자 ‘서포’

특히 서포가 노도 유배 생활 중 쓴 국문소설인 ‘사씨남정기’는 국문학사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작가는 한국문학이 마땅히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 한문소설을 배격하고 사씨남정기를 창작하였는데 이는 소설을 천시하던 당시에 소설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이후 고대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노도에서 썼다고 알려진 수필집 ‘서포만필’에는 이런 글도 나온다. 송강 정철의 가사 작품인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언급하면서 이 3개의 작품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살렸다고 극찬했다. 당시 수많은 양반들이 우리글을 천시하면서 한문을 공부하고 있던 때, 같은 양반으로서 서포는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선각자였다.

 

* 서포가 절해고도 노도에서 지은 대표작 ‘사씨남정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사씨남정기는 처첩 갈등을 중심으로 한 가정소설의 전형을 이루는 작품으로, 교씨와 동청 등 음모가들의 술책과 이들로 인해 고난을 겪는 사씨의 모습이 사실적인 묘사에 의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주인공 사씨를 인현왕후로 봤을 때, 인현왕후를 옹호하다 결국 귀양가게 된 작가가 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지적하려고 쓴 작품으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씨남정기 수업을 하면서 중국을 배경으로 설정했지만 우리의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점, 당대 사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는 점, 권선징악적 요소가 뚜렷하다는 점 등을 반드시 소개한다.

그런 후 ‘노도’라는 섬을 학생들에게 언급한다. 제주도나 울릉도, 독도 정도의 섬만 아는 학생들에게 노도를 물으면 당연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섬에서 태어나서 자란 필자는 지금도 우리나라의 여러 섬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기에 학생들에게 노도에 대해 장시간(?) 설명을 곁들인다.

노도는 얼마 전까지도 도선이 없어서 어선을 이용해야 했을 정도로 낙도 중의 낙도이다. 20여 명 정도가 사는 면적 0.41㎢의 작은 섬으로, 남해군 상주면 벽련포구에서 1.2km 떨어져 있는 데 여기서 도선 노도호가 하루 4번 왕복한다.

노도선착장은 섬의 북쪽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당연히 마을도 북쪽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다.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오래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무 그늘에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가 서 있다.

 

* 서포의 마지막 흔적 찾아

서포는 조선 숙종 때 대제학 등 요직을 두루 거칠 정도로 세도를 지녔지만, 결과적으로 장희빈 사건 때문에 이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엘리트 집안에서 살다가 유배를 간 셈이다.

더구나 유배지에서 가택연금까지 당하여 얼마나 죽을 맛이었겠는가. 기록에 의하면 3년 동안의 유배는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친 가장 무거운 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시나무는 없다.

그가 거처했다는 초막집은 동백나무 옆에 아담하게 서 있다. 새로 지은 집이라 세월의 흔적은 볼 수 없지만, 바다가 확 트인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부엌 아궁이에 솥 두 개만 달랑 있다. 서포가 유배 당시 거처하던 곳을 추정하고 지은 모형이다.

초옥 옆으로 산길이 좁게 나 있다. 서포가 직접 팠다는 우물터로 가는 길이다. 우물은 지저분하다. 서포는 자기가 파 놓은 샘에서 물을 마시면서, 솔잎 피죽과 해초를 채취해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그는 귀양지인 노도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후 숙종 18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진 남해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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