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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서 떠나는 항일 독립운동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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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서 떠나는 항일 독립운동 산책
  • 김지혜 기자
  • 승인 2019.03.05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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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항일 투쟁의 흔적을 찾아서!②...밀양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를 찾으며 한 말이다.

▲ 약산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

이 영화에 1200만이 넘는 관객이 들면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밀양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약산이 태어난 집터에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1898년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현재 밀양시 노상하1길 25-12)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항일 독립 의식이 투철했다고 한다.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 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에 처박았을 정도.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김원봉은 자퇴했다.

이 일을 함께한 인물이 이웃에 사는 동생 윤세주다. 두 사람은 뒷날 함께 의열단을 만들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동지가 된다.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앞 김원봉 흉상

보통학교를 자퇴한 약산과 윤세주는 몇 년 뒤 밀양의 동화학교에 입학했다. 충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일찍이 민족 교육에 힘썼고, 그 중심에 동화학교가 있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운 약산은 중국으로 떠나, 당시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밀양에 남아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약산을 찾아갔다. 그해 1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조선 청년 10여 명은 “천하의 의로운 일을 열렬히 실행하기로 맹세”했다. 이름만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이 탄생한 것이다.

▲ 의열단은 밀양 청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의열단은 식민 지배자와 민족 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 지배 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정규 병력으로 맞설 수 없는 일제에 대항해 무력 투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김익상과 이종암 등이 상하이(上海)에서 일본 육군 대장을 저격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 의열단장 김원봉이 있었다.

약산의 아내 박차정도 항일 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방 1년을 남기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 김원봉 생가터에 문을 연 밀양 의열기념관

의열기념관 일대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해천은 의열기념관 앞을 흐르는 시내로, 조선 시대 밀양읍성을 따라 조성한 방어용 해자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는 태극기의 종류와 변천사를 거쳐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으로 이어진다.

▲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의 안내판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 윤세주가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 단체다.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 중심이던 의열단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맞설 무장 부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됐다.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앞의 기념탑

일제강점기 내내 해외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앞장선 약산은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다시 고용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뜻을 함께한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는 등 남한에서 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와 같이 삼팔선을 넘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김원봉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으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 3.13 밀양만세운동이 벌어진 밀양 관아터

밀양의 독립운동 역사를 자세히 보고 싶다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가자. 건물 마당에는 김원봉과 윤세주를 포함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명의 흉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안으로 들어가면 밀양 만세 운동의 풍경이 생생한 디오라마로 펼쳐진다.

밀양에서는 3·13 만세 운동을 필두로 8차례 만세 시위가 있었다. 여기에는 계급과 이념, 종교를 초월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이어지는 전시실에는 의열단에서 시작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자세히 소개된다.

▲ 밀양아리랑대공원 입구에 위치한 밀양아리랑아트센터
▲ 영남루에는 현판과 시문이 많이 걸려 있다

* 찾아가기 : 경남 밀양시 노상하1길(의열기념관) / 밀양시 석정로(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 주변 볼거리: 표충사, 얼음골, 시례호박소, 월연정, 위양못 이팝나무, 만어사, 종남산, 재약산 등

<자료 한국관광공사 제공/ 글·사진 구완회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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