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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위안 주는 성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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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닥토닥’위안 주는 성주 여행!
  • 오재랑 기자
  • 승인 2016.06.02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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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문화공원

[투어코리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명문장이 아니어도 우린 늘 온갖 스트레스와 곤경에 처할 때 순간적으로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한다. 흔히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죽기 살기로 노력해’라는 말들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일상에서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성주’가 제격이다. ‘성주’는 ‘생-활-사(生-活-死)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자태실에서 ‘태어남(生)’을, 한개민속마을에선 ‘삶(活)’을, 성산가야 유적인 성산고분군에서는 ‘죽음(死)’을 대했던 우리 선조들의 철학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매년 5월 ‘2016 성주생명문화축제’가 열려 생·활·사 문화를 보다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봄기운 만연한 4월 말, 성산가야의 옛 도읍지 경북 성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 세종대왕자태실 가는

생명의 소중함 품은 생명문화공원·세종대왕자태실

 

자연의 생명력 가득한 성주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조선시대 왕들의 태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생명문화공원’이다. 생명문화공원은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호흡하고 영양분을 흡수하던 ‘생명줄’인 ‘태(胎)’를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이곳엔 태조의 태실과 태종의 태실이 축소해 전시해 놓고 있는데, 특히 태실문화관은 ▲왕실에서 태를 묻는 방법 민간에서 태 처리방법 ▲장태문화의 기원과 발전 ▲왕실의 출산 ▲조선왕실의 태교음식 ▲태를 씻는 세태의식 ▲태봉의 입지조건 ▲장태과정 ▲태실의 가봉(加封)과 시기 및 절차 ▲태실의 구조 ▲조선시대 왕의 태실 분포 등 ‘태(胎)’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 생명문화공원

* 생명줄 ‘태’는 신체의 일부

민간에서는 보통 태를 왕겨로 쌓아 불에 태우고 그 재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고 한다. 또는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거나, 태에 돌을 달아 강물이나 바다에 띄워 보내기도 했다. 그만큼 태를 신체의 일부로 여겨 ‘태’를 함부로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특히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엄격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태를 깨끗이 씻고, 항아리에 밀봉해뒀다가 좋은 날을 택해 전국 명당에 안치시켜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다. ‘태=왕실의 번영’이라고 할 만큼 ‘태’를 소중하고 각별하게 대했음을 알 수 있다.

▲ 생명문화공원

이처럼 태를 신체의 일부로, 생명처럼 여겼던 것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즉 ‘몸과 살갗, 터럭은 부모에게 받은것이니 어느 것 하나 훼손해선 안 된다’라는 유교사상을 숭배했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 생명문화공원 태실문화관

게다가 아이가 태어나 난치병에 걸렸을 때 치료하기 위해 탯줄 속 혈액(제대혈)을 보관해두는 요즘을 떠올려 봐도 의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 ‘태’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 더욱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은연중에 태가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명문화공원에서 5분정도 걸어 올라가면 ‘세종대왕자태실(사적제 444호)’이 나온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胎峰) 정상에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에서 보다 자세히 조선 왕조 태실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 세종대왕자태실
▲ 생명문화공원

이 곳은 우리나라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群集)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1기를 합쳐 모두 19기의 태실이 들어서 있다. 이중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위 찬탈을 반대했던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 5기를 훼손했다. 때문에 지금은 윗부분이 파손돼 기단만 남아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을 수호하고, 태실을 관리하던 사찰 ‘선석사’도 생명문화공원 근처에 있으니 함께 둘러봐도 좋다.

▲ 생명문화공원 선석사

 

삶(活)’을 살아가던 모습 그대로 ‘한개민속마을’

 

60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한 ‘한개민속마을’로 가봤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흙과 돌을 이용해 지은 담장과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정겨운 이 곳은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 한개마을

세종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가 이곳에 정착한 후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선비의 충절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특히 영취산(331m)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마을 앞으로 이천과 백천이 흐르는 등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산임수’ 지형의 명당 자리라고 한다.

마을 위쪽에는 기와집이, 아래로는 초가집 형태의 집들이 들어서있는데, 마을입구에서 좌측으로 가면 1911년에 지어져 20세기 초 목조건축의 수법을 살필 수 있는 ‘월곡댁’, 응와종택, 마을에서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닌 ‘교리댁’ 등을 만날 수 있다.

▲ 한개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

또 우측으로 가면 유학자 이진상이 학문의 칼을 벼리던 ‘한주종택’, 도동댁, 극와고택, 하회댁이 있다. 또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 참사 후 낙향해 세자를 사모해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평생을 은거한 돈재 이석문이 살았던 북비고택도 찾아볼 수 있다.

▲ 한개마을의 흙과 돌로 만든 담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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