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코리아] 성산가야의 옛 도읍지였던 성주군은 곳곳에 가야문화 유적과 유불 문화가 잔존 (殘存)해 있어 노천 ‘역사박물관’이라 불린다. 특히 성주에는 사람의 한평생을 상징하는 문화재가 남아 있다. 세종대왕자태실과 한개민속마을, 성산고분군을 연결하면 사람의 일생을 상징하는 문화가 그려진다.
세종대왕자태실은 ‘태어남(生)’을, 민속마을인 한개민속마을은 ‘삶(活)’을, 성산가야 유적인 ‘성산고분군은 ’죽음(死)‘을 상징한다. 그러나 성산고분군에서 순장의 흔적을 볼 수 있어, 이곳에서의 죽음은 영면(永眠)이 아닌 인생의 도돌이표가 아닌가 한다.
’생활사(生活死) 문화의 고장‘, 성주군(星州郡)으로 인생 여행을 떠나보자!!
태어남이 있는 곳 세종대왕자태실
태실(胎室)은 아이의 태가 묻힌 곳을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태는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태는 땅에 묻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왕겨로 태우거나, 강물에 띄워 보내 처리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자손들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당에 안치시켜 생명존중과 왕권의 안정,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胎峰) 정상에 들어선 세종대왕자태실(사적 제 444호)은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세종의 적서(嫡庶) 18
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1기를 합쳐 모두 19기의 태실이 위치한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완전하게 군집(群集)을 이룬 유일한 곳이다.
전통 삶이 있는 곳, 한개민속마을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영취산이 포근히 감싸고, 마을 앞쪽에 하천이 흐르고 있어 영남 최고 길지로 꼽힌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 참사 후 낙향해 세자를 사모해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평생을 은거한 돈재 이석문과 조선 말 공조판서를 지내고 사후에는 불천위에 오른 응와(凝窩) 이원조, 유학자 이진상 등 많은 명현들이 이 마을에서 배출됐다.
마을을 찾으면 이석문이 북으로 사립문을 내었다는 북비고택, 이진상이 학문의 칼을 벼리던 한주종택, 1911년에 지어져 20세기 초목조건축의 수법을 살필 수 있는 월곡댁, 영조 36년(1760)에 세워져 마을에서 가장 오랜 내력을 지닌 교리댁 등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이런저런 고가들과 그저 그런 평범한 민가들이 번듯하면 번듯한 대로 보잘 것 없으면 또 보잘것없는 대로 섞이고 어우러져 한가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영생을 꿈꾼, 성산동 고분군
성산동 고분군(古墳群. 사적 제86호)은 성산가야 지배층 무덤으로 성산(星山) 자락에
129기가 잔존해 있다. 이 고분군은 성산 성주지역 최대의 규모로 5~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현재 번호를 부여해 관리하고 있는 고분은 129기이지만, 멸실됐거나 봉토(封土)가 깎여나간 고분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 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발굴조사 결과 성주 고분군은 크게 막돌이나 깬 돌을 이용해 석실의 네 벽을 축조한 할석식(割石式) 석실분과 석실의 네 벽을 넓적하고 길쭉한 판석을 세워 만든 판석식(板石式) 석실분 등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며, 매장주체가 묻힌 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묻는 부곽(副槨)을 갖춘 다곽묘(多槨墓)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곽 석실은 크기에 비해 유물이 빈약하고 부곽은 넘칠 정도로 많은 유물을 부장하고 있는 점도 밝혀졌다. 또한 다양한 토기가 가득 채워져 있는 부곽의 한 귀퉁이가 빈자리로 남아 있는 것은 노비 등의 순장자가 매장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고분에서는 유물도 많이 발견됐는데 고리칼(환두대도:環頭大刀), 금제 귀걸이(이식:耳飾), 관 꾸미개(관식:冠飾)와 큰 항아리(대호:大壺), 긴 목 항아리(장경호:長頸壺), 굽다리접시(고배:高杯) 등 모두 2,072점이 출토됐다.
마을 안녕을 기원한, 성밖 숲
조선시대 성주는 성주목이 설치되었던 영남의 큰 고을이었다. 읍성 안에는 관아와 객사, 성주사고가 있었고, 읍성 밖에는 향교와 사직단 등이 배치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성주의 명소가된 성주읍 경산리 ‘성(城)밖 숲’은 풍수지리에 의해 조성된 곳이다.
이천변을 따라 성주읍성 밖에 만들어진 이 숲에는 300~500년생 왕버들 57그루가 뿌리를 박고 있다. ‘경산지’(京山誌)와 ‘성산지’(星山誌)에 성 밖 숲이 들어선 연유가 나온다.
그 기록에 의하면 조선 중엽 어느 해에 서문 밖 마을에서 소년들이 아무 까닭 없이 죽는 등 흉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마을의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던 게 원인이었다. 그런데 한 지관(地官)이 양쪽 바위 중간 지점에 숲을 조성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해, 토성으로 된 성주읍성 서문 밖 이천 변에 밤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사연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마을 풍치와 보호를 위한 선조들의 전통적 자연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배움이 있는 곳, 성주향교
성주향교(예산리 교촌마을 위치)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됐다. 향교는 일반적으로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과 강당인 명륜당을 앞뒤로 배치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을 따르고 있는데, 성주향교는 대성전을 오른쪽, 명륜당을 왼쪽에 배치하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대성전은 우리나라 향교로는 드물게 서울 문묘 대성전과 같은 다포형식을 취했다.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고 17세기 초기로 추청 할 뿐이다.
명륜당은 맞배지붕 집으로 대청과 앞쪽에 툇 마루를 둔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다.
온돌방에는 다락을 설치해 수장 공간으로 사용하고 한다. 명륜당은 평면구성과 창호수법 등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2008년 9월 보물(제 1575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때 성주향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